20190817 오크밸리 전영록 공연

여행 2019. 8. 18. 0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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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라는 것을 정말 오랜만에 본 것 같습니다.

 

https://namu.wiki/w/%EC%A0%84%EC%98%81%EB%A1%9D

 

나이가 많으신데, 외모는 정말 젊어 보였습니다.

 

술, 담배를 안 하셔서 피규어 수집을 취미로 가지고 계셨는데, 최근 많은 분들에게 보여주려고 20여년간 수집한 것을 다 내놓으셨다고 합니다.

 

https://news.nate.com/view/20190617n25080

 

요즘은 무대 올라 오는 게 겁이 난다고 하셨지만, 공연 보니 젊었을 때와 다른 것은 못 느끼겠더라구요.

 

약간 시원했던 오크밸리의 밤을 뜨겁게 많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https://youtu.be/kOdtVgFaX6o?rel=0&vq=hd1080

 

 

https://youtu.be/8ruk2HRM8pg?rel=0&vq=hd1080

 

 

https://youtu.be/wo4P1rt-R5o?rel=0&vq=hd1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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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 여행

여행 2019. 8. 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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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박 3일 일정으로 다녀왔습니다.

 

사실 경주는 굉장히 볼 것이 많아서 다 본다는 것은 무리이지요.

 

그래서 경주시청 관광 홈페이지를 통해서

 

"경주의 과학문화재를 찾아서"

 

코스를 선택했습니다.

 

① 포석정지 → ② 첨성대(4.06km) → ③ 월성(경주석빙고)(0.76km) → ④ 불국사(13.11km) → ⑤ 석굴암(7.39km) → ⑥ 신라역사과학관(11.45km)

 

경주의 과학 문화재를 찾아서 코스는 총 36.77km 거리에 이동시간이 비교적 짧은 약 1시간 20분 정도가 소요되는 당일 여행코스이다. 주된 주제는 문화재 속에 숨어 있는 재미있는 과학이야기이다. 측우기, 칠정산, 팔만대장경,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 혼일강리도, 혼천의, 화약 무기 등 우리나라의 대표적 과학유산과 문화재이나 경주지역에는 이와 버금가는 첨성대, 석빙고, 불국사 등이 있어 경주 과학 문화재 탐방코스는 여름방학 동안 가족과 함께 떠나는 관광코스로 유익한 재미와 학습경험을 제공할 것이다.

특히 취학 중인 5학년 이상의 자녀과 함께 가족단위 여행객이 부모님과 함께 역사교과서 속에 숨겨진 옛 신라인의 과학지식을 학습할 수 있는 학습형 탐방코스로 매력적인 곳을 연계한 관광코스이다.


풍수와 음택과 양택 등 과학 속에서 바라볼 수 있는 서울과는 달리, 경주의 과학 짧은 코스 속에서 자녀에게 과학주제로 구성된 여행콘텐츠는 매력 있는 에듀테인먼트 코스가 될 것이다. 신라인의 과학이라는 특정주제를 가지고, 자녀에게 학습목적의 교양학습을 원한다면 이곳에서 백과사전보다 훨씬 생동감 있고 보람있는 과학교육 관광을 하는 것에 대하여 망설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포석정지은 자연현상에 대한 신라인들의 지속적인 관찰과 분석의 결과물을 토대로 왕이 술을 들면서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창의적인 과학적 지식의 아이콘이다. 첨성대를 찾는 관광객은 포석정지과 함께 신라시대 수학과 천문학이 제왕의 학문임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 농사를 잘 지으려면 천문에 밝아야 한다. 별자리를 보면 언제 파종할지를 알 수 있다. 천문을 잘못 살펴서 지도를 잘못하면 왕의 잘못이었다." 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석굴암과 불국사는 일반적인 건축술로는 불가능한 고도의 수학적 원리를 알아야 한다.
불국사의 튼튼한 건축, 과학적 설계로 지어진 석굴암을 보면, 천 년도 훨씬 이전에 물과 공기의 압축과 팽창에 따른 온도 변화와 결로현상을 해결한 신라인들의 과학성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경주의 과학 문화재를 찾아서 코스와 함께 경주 왕경도시의 옛 도시계획의 우수성도 알 수 있다.
원래 신라 왕경인 경주의 인구가 최전성기에는 90만 명에 이르렀는데 지금의 인구는 28만 정도. 원래 경주의 면적도 지금의 현 경주시의 몇 배나 된다. 전성기 때의 지도를 보면 거의 정사각형의 블록으로 나뉘어 과학적인 도시계획으로 왕경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과학 속에 숨겨진 인문학, 역사학을 배우고 싶다면 서슴없이 경주를 권할 수 있는 자신감은 바로 포석정지과 첨성대, 그리고 불국사를 경주가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과학이 흔히 서양에서 힘과 권력의 수단으로 번창하였다면, 경주에서 볼 수 있는 과학 문화재 코스는 백성을 위한 화답임을 기억할 수 있기를 옛 신라인들은 바랄 것이다.

 

경주의 과학 문화재를 찾아서 코스를 둘러본 아이들에게 신라가 과학으로 부흥한 국가보다는, 과학 속에 숨겨진 하늘의 원리, 즉 백성의 편안함을 존중하는 국가이었음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그 속에 유적이 가진 매력을 찾은 관광객은 오랜 세월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룩한 선조의 과학적인 사고와 발명, 외래문화를 수용하되 모방하지는 않고 우리 풍토에 맞게 독창성을 가지고 자연과 조화를 이룬 과학주제의 문화재를 찾아보면서 선조의 우수성에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6번은 제외했습니다.

 

 

 
경주 불국사
토함산에 서남쪽에 자리 잡은 불국사는 신라인들의 과학과 미학이 이뤄낸 통일신라 문화의 정수로 평가받고 있는데, 삼국 통일 이후 문화적 역량이 높았던 경덕왕 10년(751)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에 완성하였다. 이후 조선 선조 26년(1593)에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의 건물이 불타버렸다.


삼국 통일 이후 문화적 역량이 높았던 경덕왕 10년(751)은 신라 문화의 황금기였고 나라도 안정되었으며 당시 신라인들은 신라가 곧 불국토 라는 강한 자부심과 신앙심으로 부처님의 영원한 궁전, 불국사를 건축하여 불국토의 염원과 이상을 조화와 균형으로 현실화 하였다.


청운교와 백운교를 건너며 천년 고찰 불국사 대웅전에 들어서면 현실의 세계에서 부처님의 세계로 천년 세월이 두 손을 모으게 하며, 비바람에 깎인 돌과 함께 탑을 떠나지 않는 백제의 석공 아사달이 지지 않는 천년의 연꽃과 함께 반겨준다.


경내는 세 분의 부처님이 계신 대웅전, 극락전, 비로전 영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각 영역은 입구가 되는 계단과 문, 그리고 중심 건물과 이를 둘러싼 회랑으로 구성되었다. 대웅전 영역은 석가여래불의 사바세계, 극락전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 비로전은 비로자나불의 연화장 세계를 나타낸다. 


연꽃처럼 피어난 사찰 불국사는 신라의 건축기술과 불교, 토함산의 수려한 자연경관이 만들어낸 통일신라시대 사원 예술의 걸작이다.


과거의 부처’인 다보불과 ‘현재의 부처’인 석가여래의 설법 모습을 형상화한 석가탑으로 ‘법화경’의 의미를 구현하는 두 탑과 비로전의 금동비로자나불좌상, 극락전에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을 비롯한 다수의 문화유산도 당시의 찬란했던 불교문화를 되새기게 하며 1995년 12월에 석굴암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천왕문


무서운 얼굴을 하고 서 있는 4명의 사천왕은 원래 부처님이 살고 있는 수미산의 동서남북  사방을 수호하는 신으로 수미산에 오르는 사악한 마귀들을 잡기 위해 이처럼 무서운 얼굴을 하고 근엄하게 서 있는 것이다.


사천왕이 들고 있는 물건은 절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보검을 든 지국천왕은 동쪽을, 비파를 든 광목천왕은 서쪽, 용을 든 증장천왕은 남쪽, 탑을 든 다문천왕은 북쪽을 지키며 든든하게 부처님의 나라를 수호하고 있다.

 

청운교 및 백운교


불국사를 눈앞에 두고 앞쪽에 보이는 이층 계단의 아래쪽이 청운교, 위쪽은 백운교이다. 청운교, 백운교 끝에 있는 자하문으로 들어서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대웅전으로 들어서게 되며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 부처님의 나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청운교는 17단, 백운교는 16단, 총 33단으로 이뤄져 있는데, 불교에서 상징하는 마지막 서른세 번째 하늘을 도리천이라고 하며, 도리천은 세계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 정상으로,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뜻한다.


 


다보탑


국보 제20호 다보탑은 다른 탑들과는 다르게 복잡한 형태에 화려한 멋을 보여주고 있다. 다보탑이 이처럼 화려한 모습을 하게 된 이유는 다보탑이 '다보'부처님을 상징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보탑은 다보 부처님처럼 반짝이는 보석을 걸치듯 화려한 모습이 된 것이며 기묘하면서도 우아한 양식은 신라 장인들의 자유롭고 창의적인 예술 정신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통일신라 조형 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삼층석탑 (석가탑)


대웅전 서쪽에 위치한 석가탑은 신라 석탑의 완성형으로 불리며, 조화로운 비례와 세련된 멋을 보여주고 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석가모니 부처님을 상징하는 탑으로, 탑이 곧 석가모니 부처님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국보 제21호인 석가탑은 그 높은 가치만큼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어 두 차례나 도굴을 당했는데, 그 과정에서 탑 일부가 기울어지게 되었고 이를 복원하던 중 귀중한 유물들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진귀한 ‘사리장엄구’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삼층석탑 사리장엄구


1966년 10월 국보 제21호인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을 보수하기 위하여 해체하였을 때, 2층 내부에 사리봉안을 위한 공간에서 발견된 유물들이다. 


국보 제126호로, 발견된 유물은 총 45건 88점이며, 1967년부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위탁 관리해 오다가 2009년 12월 불교계에 반환되어 서울 종로구의 불교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무설전


육중한 맞배지붕집인 무설전은 불국사 건물들 가운데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고 한다. 스님들이 설법하던 장소이며 지금은 강당역할을 하는 곳이다.


무설이란 말이 필요 없이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으로 불교에서는 ‘염화미소’라고 하는데 말과 글이 아닌, 마음을 전달하고 진리에 도달하라는 부처님의 뜻으로 무설전이란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라 한다.


 


관음전


관음전은 불국사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 있는데, 이는 관음보살께서 머물고 있다는 산, ‘보타 낙가산’을 형상화한 것으로 마치 높은 산을 상징하듯 계단 역시 가파르게 만들어 이곳을 힘들게 오르는 것처럼 부처님의 가르침을 수행하는 것도 어렵다는 뜻도 담겨져 있다. 


관음전의 천수관음 보살은 천개의 손과 눈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으로 천개의 손 중앙엔 각 각 눈이 그려져 있다.  이렇게 많은 손과 눈이 필요한 이유는 많은 사람들을 굽어 살피기 위해서이다. 

 

비로전


비로자나 부처님이 계신 비로전은 진리와 빛을 상징하시는 분으로 서유기에서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에 글씨를 쓰고 내려왔다'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부처님이다.


이 불상은 통일신라 3대 금동불상 중 하나로 국보 제26호로 지정되었는데, 꼿꼿한 자세와 육중한 어깨, 양감 있는 가슴과 긴 허리에서 오는 아름다움은 비교 대상이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또한, 옷 주름도 무척이나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다.


 


사리탑


비로전 정면 좌측 전면에 새겨진 정교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돋보이는 탑이 사리탑이다. 네모난 지대석에는 창 모양의 안상을 조각하고 그 안에 꽃을 조각하였다.


사리탑은 '부도' 또는 '승탑'이라 하는데 스님의 사리를 안치하는 탑으로 사리는 부처님이나 스님을 화장하고 나오는 유골을 말하는 불교용어로, 모양은 둥근 구슬 모양에서 작은 알갱이 모양까지 다양한데, 불교에서 사리는 오랜 시간 동안 수행한 공덕의 산물로 보고 있다.


 


극락전
극락전은 1750년에 새로 지어진 건물로 이전 건물은 임진왜란 때 안타깝게 불타버렸는데 극락세계를 관장하는 아미타 부처님이 모셔진 곳으로 아미타 부처님은 ‘아미타여래’라고도 하는데 여래는 부처와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다.


극락전 안에 오른쪽 그림은 ‘반야용선’이라고 하는데, ‘반야용선’은 현실세계에서 극락으로 건너갈 수 있는 배이다. 극락전 현판 뒤를 살펴보면 복 돼지 한마리가 몰래 숨어 있는데 TV프로그램 1박2일 팀이 이 돼지를 소개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연화교 및 칠보교
아미타 부처님이 계신 극락전으로 향하는 연화교, 칠보교는 극락전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속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국보 제22호로,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며, 창건 당시부터 많은 사람들이 이 다리를 오르내리며 극락왕생을 기원하였고, 비구니가 된 신라 헌강왕비도 이곳을 오가며 왕의 극락왕생을 빌었다고 전해진다.


 


당간지주
경주시 진현동 불국사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지주로 불국사 입구 서쪽의 연화교 칠보교 맞은편에 두 쌍이 동서로 마주보는 형태로 놓여 있으며, 높이는 2.9m 정도이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446호로 두 쌍 모두 정상부를 둥글게 처리하고 안쪽에 당간을 고정시키기 위한 간구를 시공하였다.

 

경주 불국사의 대석단  최순우


크고 작은 자연괴석들과 잘 다듬어진 장대석들을 자유롭게 다루면서 장단 맞춰 쌓아 올린 이 석단의 짜임새를 바라보면 안정과 율동, 인공과 자연의 멋진 조화에서 오는 이름 모를 신라의 신비스러운 정서가 숨가쁘도록 내 가슴에 즐거운 방망이질을 해 주는 것이다.
(중략) 토함산의 서쪽 기슭, 높지도 얕지도 않은 터전에 남향해서 동서로 이어진 이 석단의 오른쪽에는 이 절 정계단인 청운교 백운교가 있고 이 돌계단을 올라서면 자하문을 거쳐서 대웅전 앞뜰이 된다. 석단의 왼쪽 계단은 연화교 칠보교, 이 다리 위 층대를 올라가면 안양문을 거쳐서 극락전 앞뜰이다.


이 안양문과 자하문 사이에는 범영루가 우뚝 솟아 있어서 이 누마루 아래를 통해서 안양문에서 청운교 다리 밑을 거쳐 가는 꿈길 같은 보랑(步廊)이 이어져 있고 불보살들이 옥보를 옮기며 오르내리는 계단으로 만들어진 청운교 백운교의 중앙 계단에 서서 단상을 우러르면 자하문과 범영루 사이로 석가탑과 다보탑이 보랏빛 아침 햇살을 받는다.


조용한 시간을 틈타서 이 뜰을 거닐 때면 언제나 그리운 사람의 얼굴이 생각나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손에 안 잡히는 나의 그리운 사람은 차라리 보살부처이기나 했으면 좋겠거니 생각하노라면 나는 금새 눈시울이 더워 오곤 했다.


경주 불국사의 이 대석단 중에서도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범영루 발밑에 쌓인 자연석 돌각담이었다. 우람스럽게도 큰 기둥이 의좋게 짜여서 이 세상 태초의 숨소리들과 하모니를 아낌없이 들려준다. 이 세계에 나라도 많고 민족도 많지만 누가 원형 그대로의 지지리도 못생긴(잘생긴) 돌들을 이렇게도 멋지게 다루고 쌓을 수 있었을 것인가 (중략)


가을 봄 산색이 바뀌고 또 광선이 바뀌고 녹음졌던 절 숲, 고림 나뭇가지에 초롱초롱 달빛이 반짝이는 정월 대보름날 밤이면 아마 옛날 신라의 숱한 아가씨들은 떼지어 탑돌이를 하며 무슨 소원을 부처님께 빌었을 것이다. 소원이 있는 사람이면 마음이 외로울 때 이 뜰이 조용한 틈을 타서 이 석단 앞에서 석단의 크고 작은 돌들을 바라보고 그리고 범영루 너머로 석가탑을 바라보기를 권하고 싶다. 새벽이면 새벽대로 달밤이면 달밤대로 석가탑의 위 토막의 희망처럼 은은하게 멀게 가깝게 눈과 마음을 적셔주는 것이다.

 

-《최순우전집》 2권, 학고재, 1992 


혜곡 최순우는 개성에서 태어나 개성부립박물관, 서울 국립박물관 학예관, 문화재 해외전시관리관, 미술과장, 학예연구실장,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을 역임했다. 문화재위원, 한국미술평론가협회 대표, 한국미술사학회 대표위원을 지냈으며, 서울대, 고려대, 홍익대,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사 강의를 하였고 홍익대 대학원에서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순우 전집1~5》(학고재, 1992)과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어서서》(학고재, 1994)가 있다.


 


경주 불국사기행  현진건


뒤로 토함산을 등지고 왼편으로 울창한 송림을 끌며 앞으로 광활한 평야를 내다보는 절의 위치부터 풍수장이 아닌 나의 눈에도 벌써 범상치 아니 했다. 더구나 돌 층층대를 쳐다볼 때 그 굉장한 규모와 섬세한 솜씨에 눈이 어렸다. 초창 당시엔 낭떠러지로 있던 곳을 돌로 쌓아올리고 그리고 이 돌 층층대를 지었음이리라. 동쪽과 서쪽으로 갈리어 위 아래로 각각 둘씩이니 전부는 네 개 인데 한 개의 층층대가 대개 열일곱, 여덟 계단이요, 길이는 57,8척으로 양가에 놓인 것과 가운데 뻗힌 놈은 돌 한 개로 되었으니 얼마나 끔찍한 인력을 들인 것인가를 짐작할 것이요, 오늘날 돌로 지은 대건축물에도 이렇듯이 대패로 민 듯한 돌은 못 보았다 하면 얼마나 그 때 사람이 돌을 곱게 다루었는가를 깨달을 것이다. 돌 층층대의 이름은, 동쪽 아래의 것은 청운교, 위의 것은 백운교요, 서쪽 아래의 것은 연화교, 위의 것은 칠보교라 한다. 층층대라 하였지만 아래와 위가 연락되는 곳마다 요새 말로 네모난 발코니가 되고 그 밑은 아아치가 되었는데 인도자의 설명을 들으면 옛날에는 오늘날의 잔디밭 자리에 깊은 연못을 팠고, 아아치 밑으로 맑은 물이 흐르며 그림배畵船가 드나들었다 하니 돌 층층대를 다리라 한 옛 이름의 유래를 터득 할 것이다.


층층대 상하에는 손잡이 돌이 우뚝우뚝 서고 쇠사슬인지 은사슬인지 둘러꿴 흔적이 아직도 남았다. 귀인이 이 절을 찾을 때엔 저 편 못가에 내려 그림배를 타고 들어와 다시 보교를 타고 이 돌 층층대를 지나 절 안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단다. 너른 못에 연꽃이 만발한데 다리 밑으로 돌아드는 맑은 흐름엔 으리으리한 누각과 석불의 그림자가 용의 모양을 그리고 그 위로 소리 없이 떠나가는 그림배! 나는 당년의 광경을 머리 속에 그리며 스스로 황홀하였다.


이 돌 층층대를 거치어 문루를 지나서니 유명한 다보탑과 석가탑이 눈앞에 나타난다. (중략) 다보탑을 능라와 주옥으로 꾸밀 대로 꾸민 성장미인盛裝美人에 견준다면 석가탑은 수수하게 차린 담장미인淡裝美人이라 할까. 이 탑의 별명은 무영탑無影塔, 곧 그림자가 없다는 것으로 여기는 사랑과 예술에 얽힌 눈물겨운 로맨스가 숨어있다. 그때의 사람이 얼마나 종교와 예술에 몸을 바치었고 또는 사랑과 예술을 한덩어리로 만든 황홀경에서 살았다는 것이 아름답고 슬프고 신비로운 이 전설에 풍겨 있다.


발췌 : 《한국의명문》, 대중서관, 1981 

 

소설가 빙허 현진건은 월탄 박종화의 표현에 의하면, “한국문학사상 사실주의 개척으로 뚜렷한 업적을 남긴 ‘비상한 기교의 천재’이며, 김동인과 함께 선명한 묘사 정확한 표현과 구성으로 우리나라 근대 단편소설을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다. 현진건은 도쿄 독일어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개벽>에 작품을 발표한 뒤, 이상화, 박종화, 박영희와 동인지 <백조>를 창간하였으며, 그의 대표작으로는 《빈처》, 《B사감과 러브레터》, 《운수 좋은 날》, 《술 권하는 사회》 등이 있다.
‘경주 불국사기행’은 현진건이 동아일보 기자 시절 신문에 발표한 기행문이며, 그는 1935년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구금되어 1년간 복역 한 뒤, 일제의 압력과 감시에 양계로 소일하다가 1941년 죽었다.

 

석가탑 출토 사리기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는 보상당초무늬가 투각된 전각형 사리기가 발견되었다. 그 안의 금동제, 은제, 향목제의 각종 사리병이 있었고, 여러 스님이 바친 향과 동경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무구정광대다라니경 두루마리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물로 알려져 있다.

 

석탑 해설도


탑은 크게 기단부, 탑신부, 상륜부 등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탑의 층수를 셀 때는 상륜부와 기단부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인 탑신부 즉 몸체 부분만 센다. 이층 기단의 삼층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에 나타나는 전형적인 석탑 양식이다.

 

경주 불국사의 옛 모습


528년(법흥왕 대)이라는 기록 (<경주 불국사고금창기>)도 없지는 않지만, 창건과 관련한 여러 기록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751년(경덕왕 대)의 김대성이라는 인물이다.


<삼국유사>에 전하는 내용을 요약해보면, “김대성은 신라 신문왕 때 사람으로 모량리에 살았다. 가난하게 살았어도, 내세에 복을 받는다는 말을 믿고 어렵사리 마련한 밭을 시주하였는데, 그 일이 있고나서 얼마 후 죽게 되었다. 그리고는 재상인 김문량의 아들로 다시 태어났다. 사냥을 좋아하던 김대성이 토함산에서 곰을 잡고 잠시 잠이 들었는데, 꿈에 곰이 나타나 원망하였다. 김대성은 곰에게 용서를 빌며 곰을 위해 절을 지을 것을 약속하였다. 이 일로 깨달음을 얻은 김대성은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석굴암)을 세우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 경주 불국사를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성은 경주 불국사가 완성되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이후 30년 뒤 나라에서 80여 동의 건물을 지어 완성하였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경덕왕이 3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13년 동안이나 홀아버지로 살면서 고독한 여생을 보낸 것을 생각하며 간절한 마음으로 불사를 일으키되, 신라가 불국토라는 사실을 천하에 알리기 위해 경주 불국사를 지은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후 경주 불국사는 임진왜란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가 1604년부터 복구와 중건을 시작해 1805년까지 40여 차례에 걸쳐 부분적인 중수를 하였다. 이후 조선 후기 국운의 쇠퇴와 더불어 경주 불국사 역시 많은 건물이 파손되고 문화재가 도난당하는 비운을 겪게 된다.


1924년 일제 강점기에 대규모 개수 공사가 실시되었으나, 이때 행방불명되거나 철저한 고증 없이 이뤄지는 수난을 겪었다. 1966년 석가탑의 해체 복원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주소 : 불국로 385 불국사 (진현동)
전화번호 : 불국사 054-746-9913
 

 

경주 석굴암 석굴(석굴암)
신라의 황금기를 구가한 시절로 평가받고 있는 경덕왕(742~765)때에 수많은 불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지거나 시작된다. 석굴암, 불국사의 창건, 황룡사 종,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등등. 그 숱한 불사 가운데에 최고의 정점을 꼽는다면 단연 석굴암이다. 석굴암(본래 석불사)의 석실 안에는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와 여러 제자와 보살들이 그 깨달음의 순간을 긴장하며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 구현돼 있다. 비록 석실 안에 들어가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속속들이 볼 수 없지만, ‘깨달음’을 향해 집중된 순간의 긴장감은 1200년이 넘는 까마득한 시간이 지난 마당에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한 시대의 작품에는 그것을 만든 사람들의 마음과 표정이 담기게 마련이라고 한다. 본존불을 비롯하여 주변의 보살과 제자들의 형상은 부처의 설법을 듣고자하는 신라인의 그 모습 그대로가 아닐까? 신라인의 마음을 헤아리며 들어선 석굴암에서는 깨달은 순간의 고요와 부처의 절대 미소에 매혹당해, 석굴암 벽 한켠에 보살이나 제자 중의 한 사람으로 자신도 모르게 붙박히는 경이로운 체험이 어렵지 않다.
석굴암의 불상 배치
인도의 석굴 양식을 본떠 만들었으나 자연적으로 생기거나 파서 만든 석굴이 아니라 360여 개의 돌을 짜맞추어 내부 공간을 만든 뒤 흙으로 덮어 굴처럼 보이게 만든 인공 석굴이다.
여기에 석굴암의 건축학적 우수성이 드러난다. 내부는 네모난 전실과 원형의 주실, 두 공간으로 크게 구분된다. 모두 40구(2구 분실)의 조각상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대칭 상태로 배열되어, 완벽한 균형감과 안정감을 자아낸다.


전실 
천상세계로 통하는 복도와 같은 역할을 하며, 불법을 수호하는 지킴이들이 자리하는 공간이다. 조각들은 모두 힘센 장사나 용감한 무사 또는 눈을 부릅뜬채 무서운 표정을 짓고 있다.
팔부신중: 가상의 동물들로 인도의 힘있는 신들이었는데, 석가모니의 교화를 받아 불교의 수호신이 되었다.
인왕상: 탑이나 사찰의 문 양쪽에서 수문장의 역할을 맡는다.
사천왕상: 수미산 중턱에서 동서남북 네 하늘을 관장한다.
팔각 돌기둥: 전실과 주실 사이에 놓여 있다. 석굴암 전체를 떠받히는 기둥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나 천상과 지상 세계의 경계를 구분하는 상징적 역할을 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때 일본이 두 기둥을 가로지르는 아치형의 돌을 놓아 동해를 바라보는 본존불의 시야를 가로막고 말았다.


주실
바닥도 천장도 모두 둥근 천상의 세계이다. 주인공은 단연 본존불로, 그 주의의 둥근 벽면에 여러 보살과 제자들이 부처의 설법을 듣기 위해 모여 있다.
본존불: 높이 3.4m, 대좌까지 합치면 5m나 되는 큰 불상이지만 신체의 비례가 알맞고 각 부분이 세련된 솜씨로 조각되어 있다. 본존불이 석가모니불이냐 아미타불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으나 석가모니가 부처의 형상으로 여러 대중과 보살에게 깨달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범천과 제석천: 석가모니를 찬양하고 불법을 지키는 신이다. 우리나라 범천상 가운데 가장 뛰어난 조각 작품으로 꼽힌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지혜와 실천행이라는 부처님의 두 가지 덕성을 상징하는 분이다. 석굴암의 문수보살은 발우를 들고 있으며, 옆의 보현보살과 비교하면 귀걸이가 없는 등 옷과 장식들이 비교적 단순하다. 보현보살은 온몸에 찬란한 장신구를 걸쳤으며, 왼손에 경책으로 보이는 두루마리를 들고 있다. 두 보살 모두 중앙의 본존불을 향하고 있다. 
십대 제자: 모두 머리를 깎고 가사를 두른 채 설법, 수도, 공양 등을 하는 모습이다. 손발 동작, 얼굴 표정 등이 저마다 달라 생동감이 넘친다.
십일면관음보살: 자비로 중생을 구제하는 보살이다. 본존불 내에서 가장 화려한 조각이며 아름다운 신라 여인을 연상케 하는 모습이다. 본존불과의 사이에 작은 5층 석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행방을 알 수 없다.
감실의 보살상: 본존불의 어깨 높이에 열 개의 감실이 있는데, 그 중 2곳이 비어있다. 모두 좌상이다.
연화문 천장 덮개돌: 연화문의 천장 덮개 돌은 무게가 20톤이나 된다. “창건 당시 돌이 떨어져 세 조각으로 깨진 것을 놓고 고심하던 김대성이 꿈을 꾸었는데, 천신이 나타나 깨진 천장을 다시 붙여놓고 갔다”고 한다. 지금도 그 균열이 남아 있다. 


 


석굴암 관세음의 노래  미당 서정주


그리움으로 여기 섰노라.
호수와 같은 그리움으로,


이 싸늘한 돌과 돌 사이
얼크러지는 칡넝쿨 밑에
푸른 숨결은 내 것이로다.


세월이 아주 나를 못 쓰는 티끌로서
허공에, 허공에 돌리기까지는
부풀어 오르는 가슴 속에 파도와
이 사랑은 내 것이로다.


오고가는 바람 속에 지새는 나날이여.
땅 속에 파묻힌 찬란한 서라벌,
땅 속에 파묻힌 꽃 같은 남녀들이여.


오! 생겨났으면, 생겨났으면.
나보다도 더 나를 사랑하는 이
천년을 천년을 사랑하는 이
새로 햇빛에 생겨났으면,


새로 햇볕에 생겨 나와서
어둠 속에 날 가게 했으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이 한 마디 말 님께 아뢰고
나도 인제는 바다에 돌아갔으면!


허나, 나는 여기 섰노라.
앉아 계시는 석가의 곁에
허리에 쬐끄만 향장을 차고,
이 싸늘한 바윗속에서
날이날마다 들이쉬고 내쉬이는
푸른 숨결은
아, 아직도 내 것이로다.

 

석굴암의 구조와 신비


석굴암은 전체적인 설계와 공간 배치에서 수학적인 비례 배분과 과학적인 자연 통풍, 온도 및 습기 조절, 모든 조각의 예술적 완성도, 불교 사상에 근거한 설계 등 수리학과 기하학, 건축학, 예술, 종교적 안목과 높은 과학기술이 총체적으로 결합, 완성된 작품이다. 그 동안 여러 차례에 걸쳐 보수 공사를 하였고, 많은 과학자들이 석굴암의 신비를 벗기려고 시도하였다. 그러나 아직도 그 신비를 완전히 해독하고 있지 못하다. 깊이 알수록 무서우리만치 사람을 놀라게 하는 불후의 명작이다.

 

인체에서 각 부의 치수 관계가 10분의 1일 때 가장 아름답고 안정감이 얻어진다고 한다. 이를 ‘균제 비례’라 하는데, 석굴암 본존 불상도 이런 균제 비례가 적용되었다. 얼굴과 가슴, 어깨, 무릎의 비율이 1:2:3:4. 본존불을 1로 봤을 때 10분의 1인 균제 비례가 적용되는 것이다.본존불은 주실의 한가운데 자리하지 않고 뒤로 약간 물러난 위치에 있다. 만약 본존불이 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면 주실이 비좁고 답답한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석굴암은 지하로부터 물이 솟아나와 굴의 바닥 아래를 흐르면서 석굴 내부의 온도와 습도를 조절했다. 그러나 일제의 보수 공사 이후 이와 같은 자연 정화 능력을 잃어버렸다.


본존불의 뒤에 자리잡은 광배는 여느 불상과 달리 불상의 몸체에서 떨어져 벽면에 부착되어 있다. 또한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이다. 이는 보통 사람의 눈높이인 160cm에서 보면 원형으로 보이게 되어 있다.


주실의 돔은 우주 공간을 축소해 놓았다. 돔의 둘레 360도는 태음력의 1년을, 돔의 지름 24척(신라인이 사용한 자의 1척은 29.7cm)은 하루 24시간을 나타낸다. 또한 돔의 중심과 전실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직선 방향은 동남 30도로 동짓날 해 뜨는 방향과 일치한다.


네모난 돌을 짜맞추어서 반구(돔)형을 만드는 것은 고도의 지식과 기술을 요하는 일이다. 신라인들은 네모난 판석돌 사이에 비녀 모양의 돌못을 만들어 박아 이 문제를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주실 천장이 우주처럼 보이는 효과도 만들어냈다. 이와 같은 방식은 석굴암이 무너지지 않고 오랜 세월을 견딜 수 있게 하였다.


석굴암 전체의 구조를 기하학적으로 분석해보면 모든 공간이 가로 세로, 또는 세로 가로의 비율이 1:2인 직사각형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석굴암 본존 석가여래
글·사진 강우방


석굴암의 핵심은 본존 석가여래다. 또 그 핵심은 그 본존 석가여래가 나타내는 깨달음이다. 그것은 어두움-무명, 즉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 주는 빛이다. 깨달음은 사람의 몸에서는 금빛이 발산되는데 그것이 두광으로 표현되며, 그 중심이 바로 백호이며 얼굴에서는 양 미간의 위에 있다. 하나의 긴 흰 털이 오른쪽으로 말리고 있으며 백옥과 같은 빛을 끊임없이 발산한다. 말하자면 백호는 빛의 근원이며 만물이 지니고 있는 기의 표현인 소용돌이 무늬로 나타낸 것인데, 실제로는 백옥인 투명한 수정을 감입한다. 석굴암의 백호 자리에는 금박을 깔고 수정을 감입해 금빛이 나도록 했다. 삼십이상 가운데 하나. 바로 그 자리는 후에 제 삼의 눈, 즉 마음의 눈이 자리잡는다. 바로 그 자리가 일체를 만드는 마음의 자리다.


 


석굴암 본존 석가여래
석굴암의 핵심은 본존 석가여래이고, 그 존재의 핵심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극복하여 깨달음에 이른 원만한 모습이다.


 


석굴암 천장의 천개석
천개석은 왜 세 조각으로 깨어져 있는가.
김대성은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불국사와 석굴암을 인류 최고의 예술품으로 만들려고 노력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석굴암이 완성될 즈음, 마지막 작업을 위해 큰 돌 하나를 다듬어 천개를 만드는데 돌이 갑자기 세 조각으로 갈라졌다. 노쇠하고 지칠 대로 지친 대성은 낙담 끝에 망연자실하여 땅바닥에 주저앉는다. 덮쳐 오는 피로에 어렴풋이 잠이 들었는데 천신이 내려와 그 큰 조각 난 돌을 올려 놓고 돌아간다.
떨어뜨려서 깨졌는지 확실치 않지만, 천개석은 그 당시 공사 중에 깨진 것만은 틀림없다. 김대성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한 하늘이 깨진 것을 그대로 올려 놓았으니 천인합일 사상이 이 천개석에 아름다운 이야기로 아롱져 있다.


 


석굴암 본존의 왼손
싯다르타 태자는 두 손을 무릎에 포갠 선정인의 자세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깨달으면서 오른손을 내려 향마촉지인을 취하며 악마를 물리친다. 왼손은 원래 선정인 때의 모습 그대로다.


 


본존의 항마촉지인을 취한 오른손

 

우리의 미술과 공예  고유섭


우리는 무엇보다도 잊어서 안 될 작품으로 경주의 석굴암의 불상을 갖고 있다. 영국인은 인도를 잃어버릴지언정 셰익스피어를 버리지 못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은 이 석굴암의 불상이다. 그곳에는 팔부중상이 있고 인왕이 있고 사천왕이 있고 사보살이 있고 십대제자가 있고 관음이 있고 팔대보살이 있고 석가원상이 있다.(중략)
 거대한 연화대좌도 아름다운 작품이지만 9척 고상高像이 촉지항마觸地降魔의 인상으로 온엄溫嚴한 봉안鳳眼을 반개半開하고 동해 창파蒼波를 굽어 살펴 진좌鎭坐하신 위용! 결가부좌結跏趺坐하신 족상足相도 안평구원安平具圓 하시거니와 무릎도 섬세한 듯 둥글고 무릎까지 뻗어 내린 긴 손도 살찐 듯 부드럽고 온화하시거니와 양어깨 양팔도 풍만원융豊滿圓融하시고 가슴도 평정장엄하시거니와 등줄기도 곧고 엄숙하시고 귓밥도 길게 늘어뜨리고 입술도 두툼하니 내리셨거니와 콧날도 우뚝하시고 눈동자도 빼어나거니와 머리도 원만하시다. 피도 없고 물도 없고 마음도 없고 정情도 없는 화강 거석 花崗 巨石에서 맥박이 충일하고 신성神性이 횡일橫溢하고 호흡이 가지런하고 온엄溫嚴이 구비된 위상偉像이 드러날 때 환희歡喜는 조공彫工의 손에 있지 아니하고 신라천지를 휩쌌을 것이요 우주 속에 메아리쳐 퍼졌을 것이다.
(중략)
대개 불상의 후면 광배光背는 원상圓像에 직접 부착되어 있는 까닭에 매우 공예적 고정성과 비현실적 부자연성이 많은 것이지만 이 불상의 배광背光은 원상과 멀리 떨어져 따로이 벽면에 가 붙어 있는 까닭에 이상의 결점이 사라졌을 뿐더러 관자觀者의 행보위치를 따라 자유로이 유동되어 급기야 원상 직전에 다다라 온안溫顔을 인관印觀할 때는 전자의 배광이 어느덧 정상의 연화蓮花로 변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니 이것이 천정최정天井最頂에 남아있는 일타연화一朶蓮花의 존재 이유이다. 이와 같이 배광이 본체에서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본체를 항상 떠나지 않고 비치고 있는 곳에 다른 어느 조각품에서도 볼 수 없는 특색이 있다. 일반 불상 조각이 그 객관적 소재성에서 받는 불가피의 고정감을 끝까지 버리고 이와 같이 자연적 사실성을 살려 유동성을 발휘한 것은 실로 경탄할 신기神技라 아니 할 수 없다.


발췌 : <고유섭전집2>, 통문관, 1993


“우현 고유섭은 한국미술사 및 미학사의 주춧돌과 같은 인물이다. 일본인들에 의해서만 관심이 되고 연구되어 오던 한국미술이라는 장르에 대해서 최초로 손을 댄 이가 우현이요, 이것을 어지간이나마 완성시킨 이가 또한 우현이다. 그의 《조선미술문화논총》, 《한국미술사 및 미술논고》, 《조선탑파의 연구》, 《고려청자》 등은 이미 한국 미술의 고전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현의 명문이라면 〈한국미술 문화의 몇몇 성격〉이라든가 〈한국고미술의 특색과 그 전승문제〉 등을 들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부류의 글은 뒷사람들에 의해서 여러 번 논의되어 왔고 ‘구수함’이라든가 ‘맵자함’, ‘적막함’이라는 유의 특질분석은 이미 지양되어 온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미학과 조선미술사를 계통 있게 연구하신 유일한 국보적 존재”인 고유섭은 1905년 인천에서 태어나 경성 보성고보와 경성제대 법문학부 철학과에서 미학과 미술사학을 전공하고 졸업한 뒤, 개성부립박물관장을 역임하였다. 이화여전과 연희전문에 출강하였으며, 해방을 불과 1년여 앞둔 1944년 6월에 영안하였다. 통문관에서 《고유섭전집1~4》이 나왔다.(1993)
사진:강우방(미술사학자, 전 국립경주박물관 관장·이화여대 미술사학과 초빙교수, 현 일향 한국미술사연구원장)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  야나기 무네요시


걸음을 굴 밖에서 굴 안으로 옮기면 마음도 또한 안(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위대한 불타는 숙연히 그 부동의 모습을 연화대좌 위에 갖춘다. 우러러보는 자는 그 모습의 장엄과 미에 감동되지 않을 수 없다. 여기는 전부 안(내면)인 영(靈)의 세계이다. 그는 앞에 네 사람의 여보살을, 뒤에는 십일면관음을, 그리고 좌우에는 그가 사랑하는 열 사람의 제자를 거느리고 영원의 영광을 고한다. 감실에 있는 여러 부처는 그 법열을 찬송하는 듯하다. 여기는 밖(석굴밖)인 힘의 세계는 아니다. 안(내면적)인 깊이의 세계다. 미와 평화의 시현이다. 또한 장엄과 그윽함의 영기(
靈氣)다. 얼마나 선명한 대비가 굴의 안팎에 나타나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은 밖으로부터 안으로 돌아간다. 동(動)에서 정靜(고요)으로 사는 것이다. 종교의 의미는 이 굴원에서 다하는 듯한 느낌이다.(중략)
굴원 깊숙이 관음상 앞에 다가서면, 잠시 마음은 정화되고 사랑의 세계에 소생한다. 얼마나 주의 깊게도 작자는 사람의 마음에 대비하였던가! 엄숙하고도 깊고 무거운 열 개의 조각 한가운데 한 여성이 조용히 서 있다. 어느 누가 그녀의 자비로운 염원을 그 얼굴에서 읽지 않을 수 있을것인가! 작자는 이 조상을 새김에 있어 얼마나 정한 기쁨을 느꼈을까? 설사 그 형식에서 새로운 요소를 찾지 못한다 할지라도 이 작품은 영원한 마음의 징표이다.
나는 이제 나머지 하나, 이 굴원의 중앙을 차지하는 불타의 좌상에 대해서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다. 그러나 누가 능히 이 조각에 나타난 그의 뜻을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이야기할 수 없는 사실에 바로 이 조상(彫像)의 미가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아무런 착찹한 수법도 볼 수 없다. 그를 덮은 옷의 선도 가까스로 셀 수 있을 따름이다. 좌선하는 그의 가슴은 단정하고, 얼굴은 앞을 향했으며, 한 손은 꺽어서 가슴 아래에 놓고, 다른 손은 그저 드리워 앞에 있을 뿐, 이것이 작자가 준 외형이다. 그는 아무런 과장도 복잡성도 밖에 지니지 않았다. 그러나 실로 아무것도 없는 지순(至純)의 그 속에서 작자는 불타로서의 지고(至高)와 위엄을 정확히 포착했고, 그것을 정확히 표현 할 수 있었다.
모든 의미는 그 단정한 얼굴에 집중된다. 그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고 감은 눈은 쉬는 듯하다. 그는 그윽하고 고요한 이 굴원 속에 앉아서 참으로 깊은 선(禪)의 세계에 잠겨있다. 그것은 모든 것을 말하는 침묵의 순간이다. 일체를 안은 무(無)의 경지이다. 그 어떤 진실이, 그 어떤 미가 이 찰나를 초월할 것인가. 그의 얼굴은 이상한 아름다움과 깊이로써 빛나지 않는가! 나는 많은 불타의 좌상을 보아왔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신비를 간직하는 영원한 하나이리라. 나는 이 좌상을 거쳐서 조선이 지난날에 맛볼 수 있었던 바 불교가 심대하였음을 믿는 터이다. 이와 같은 작품에 있어서는 종교도 예술도 하나이다. 우리는 미에서 참을 맛보고, 참에서 미를 즐긴다.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는 이 글을 1919년 〈예술〉지 6월호에 ‘석불사의 조각에 대하여’라는 논제로 실었다.-야나기 무네요시, 〈한국과 그 예술〉, 지식산업사, 1974/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을 생각한다〉, 학고재, 1996에도 이 글이 수록되어 있다.


위 사진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감흥을 받았을 당시의 석굴암 본존불

 

석굴암의 옛 모습


<삼국유사>에 따르면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었다고 한다. 본래 ‘석불사’라는 독립된 절이었으나, 임진왜란 이후 불국사에 속한 암자가 되면서 석굴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조선시대 등장하는 몇몇 기록 또는 그림 속에 석굴암 또는 석불사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유물의 중대성에 비해 그 기록은 미미한 편이다.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지 못한 채 찾는 이가 거의 없는 상태로 방치된 듯하다. 그러다 일제시대 한 일본인 우편배달부가 우연히 석굴암을 발견한 것이 일본인들 사이에 ‘토함산에 보물이 있다’는 식의 소문으로 돌면서, 도굴꾼들은 경주와 토함산으로 몰려오게 된다. 도굴꾼들은 우선 운반이 쉬운 조각상을 두 점 떼어갔는데, 그것이 바로 감실 안의 보살상이다. 이 조각은 석굴암의 여러 조각 가운데에서도 단연 뛰어났다고 한다.
이후 일제는 도굴을 막고 발굴한다는 명목으로 1913년에서 1915년 사이에 세 차례에 걸쳐 석굴암을 완전 해체하여 수리하였다. 그러나 석굴암의 원형에 대한 철저한 고증 없이 복원하여, 석굴암의 본래 구조와 조각들의 위치를 변경하였을 뿐만 아니라, 시멘트를 마구잡이로 사용하여 석굴암이 본래 지니고 있던 환기와 습기 조절 능력을 훼손하여 지금까지도 석굴암을 보존하는 데 큰 문젯거리가 되고 있다.

주소 : 불국로 873-243 (진현동)
전화번호 : 054-746-9933

 

경주 석빙고
월성 내에 있는 석빙고는 조선 영조 14년(1738)에 만든 얼음 창고이다. 길이 19m, 너비 6m, 높이 5.45m의 석실은 직사각형으로 , 약 1000여 개의 돌이 쓰였고 천장 외부는 봉토의 형상으로 북쪽 성루 위에 남북으로 길게 자리하고 있다.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천장에는 공기구멍 셋이 있고, 바닥은 물이 빠질 수 있도록 홈을 파서 비스듬하게 만들었다. 출입구는 남쪽에 있고 계단을 통하여 출입하게 되어 있다.


석빙고 얼음은 높은 신분의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었다. 또한 얼음은, 음식에 사용되는 것 이외에도, 시체의 부패를 막기 위한 장례의식과 고열환자의 열을 내려주는 치료 목적으로도 사용되었다.

주소 : 문천길 5 (인왕동)
전화번호 : 054-779-8743~8759
 

 

경주 첨성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때 만들어진 첨성대가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에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이라는 주장, 사방 어디에서 보나 똑같은 모습 그 자체로 해시계의 역할과 불교에서 말하는 세계의 중심인 수미산을 본떠 만든 건축물 등 여러 주장들이 있다.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서 있는 첨성대는 둥근 하늘을 상징하는 원형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쌓은 돌이 모두 362개로, 음력 1년의 날 수와 같고, 12개의 기단은 1년의 12달을 의미해서 신라인들에게 달력의 개념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한다.


첨성대가 세워진 후, 삼국사기에는 일식, 월식, 혜성의 출현, 기상이변 등을 관측한 기록들이 예전 보다 많고 매우 정확한 것이어서, 아름다운 외형과 과학적인 구조로 만들어진 첨성대가 뛰어난 건축기술과 과학기술이 접목된 우리 민족의 독창적인 문화유산임에는 틀림이 없다.

주소 : 첨성로 169-5 (인왕동) 
 

 
경주 포석정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이곳은 궁궐의 이궁지로 왕의 별장과 같은 곳으로, 신라의 멸망이 서린 비극의 장소로도 알려지고 있다.


신라 말 경애왕이 이곳에서 연회를 벌이고 있었는데, 후백제의 견훤이 쳐들어왔고, 경애왕은 견훤의 강압에 못 이겨 자살을 하고, 천년 신라는 서서히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근에는‘견훤이 쳐들어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도 음력 11월의 추운 겨울에 과연 그렇게 질펀하게 놀 수 있었을까’라는 의문이 제기되면서, 포석정이 단순히 유희를 즐기는 곳이 아니라 나라를 위해 순국한 사람을 기리던 곳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야트막한 산으로 에워싸여 경관이 수려한 포석정엔 지금은 건물은 없고, 물길을 따라 술잔이 흘러갔다는 구불구불 석조 구조물만 남아 있는데,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원래 물을 붓는 자리에 거북이처럼 생긴 돌이 있었지만 19세기 말 누군가가 안동으로 옮겨갔다고 하는데, 추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곳에서 ‘포석’이라는 명문이 새긴 기와가 발견되었으며, 여기에 있던 정자를 포석정이라 하였다.

 

포석정의 회돌이 현상, 유상곡수

 

유상곡수는 중국과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널리 행해졌다. 하지만 포석정은 중국이나 일본 것과는 달리 아주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중국이나 일본의 유상곡수 터는 물이 그냥 흘러가는데 포석정은 술잔이 물길의 굽은 부분과 굴곡진 부분에 오면 뱅뱅 돌거나 멈춘다. 이처럼 술잔이 물의 흐름과 반대로 회전하는 것을 ‘회돌이 현상’이라고 한다.

포석정의 수로는 그 형태가 구불구불하고 폭이 일정하지 않다. 벽면과 바닥도 기울기가 다르게 깍여 있다. 이런 불규칙성이 물의 흐름을 다양하게 만든다. 이 때 수로를 따라 술잔이 흐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제각각이다. 수로와 물의 흐름이 불규칙해 잔의 무게, 술의 양, 술잔을 놓는 위치에 따라 그 흐르는 속도와 멈추는 지점이 변하는 것이다. 물 흐름에 관련된 이와 같은 불규칙성은 자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포석정은 이같은 자연현상에 대한 신라인들의 지속적인 관찰과 분석의 결과물이다.


원래는 유입구에 큰 돌거북 조각이 있어 그 입에서 물이 나와 돌홈으로 흘러가게 하였는데, 조선 말기에 사라져 그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회돌이 현상

잔을 띄웠을 때 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돌 수 있었던 것은 물길의 주흐름에 반하는 소용돌이(회돌이) 현상이 생기도록 설계했기 때문이다. 회돌이 현상에 따라 술잔이 물길을 따라 흐르다 멈추면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이 시를 읊는다. 술잔이 수로를 한 바퀴 도는 동안 시를 지어야 하는데, 물이 굽이굽이 돌지 않고 그대로 흘러가면 2~3분만에 돌아오므로, 그 짧은 시간에 시를 지을 수는 없다. 물길을 굴곡지게 한 것은 시를 제대로 짓는 데 필요한 7~8분의 시간을 벌어야 하기 때문이다.


포석정의 옛 모습

 

돌홈을 파서 물을 흐르게 하고 그 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놓고 술잔을 주고 받으며 즐기던 인공 수로 유구(수로의 길이는 22m, 포석형 구간은 약 18m)만 남아 있는 포석정.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삼국유사>에 49대 헌강왕(876~886)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향연을 베풀었을 때, 남산신이 임금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하여 오랫동안 이곳이 왕실 사람들의 향락을 위한 곳으로 알려져 왔다.

근래 포석정 발굴 조사 중 ‘포석(砲石)’이라 새겨진 기와가 나와, 포석정 주변에 이 기와를 사용했던 건물이 있었음이 확인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주변의 여러 건축 터는 지금도 알지 못하고 있다. 포석정 동북쪽에 배성못자리가 있는데, 그 못이 포석정 수원지라 전하며, 북쪽 개울을 건너 대나무밭 속에 있는 마을이 성남이궁(城南離宮)터라고 한다. 이궁이란 임금이 행차했을 때 머무는 별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근래에는 포석정이 단순히 풍류를 즐기기 위한 오락 시설이 아니라 종교적인 제사가 행해지던 신성한 장소였을 것이라는 가설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 경주포석정지는 경주 포석정지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2011. 7.)

주소 : 남산순환로 816 (배동)
전화번호 : 매표소 054-745-8484
 

내려가면서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했습니다.

 

 

포석정입니다.

 

저기에 잔을 띄워서 음주가무를 즐겼다니 신기하네요.

 

 

 

 

주차하고 좀 걸어 가야 됩니다.

 

아니면 돈 내고 비단벌레차를 타거나.

 

 

 

 

경주 왔으면 꼭 먹어야 되는 황남빵입니다.

 

전 보리빵이나 경주빵은 패스합니다.

 

 

 

 

진짜 시원한 바람이 나오는 석빙고입니다.

 

 

 

 

이제 점심 식사하러 경주 출신 지인에게 소개 받은 식당으로 이동합니다.

 

[음식정보]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왕신리 청산숯불갈비

 

숙소로 가서 체크인 했습니다.

 

[여행] - 경상북도 경주시 한화 리조트 담톤

 

석굴암으로 왔습니다.

 

주차장 난간에 관광용 망원경이 있었는데 사진으로만 봤습니다.

 

 

종이 있는 정자가 있었는데 돈을 내고 칠 수 있어서 패스했습니다.

 

 

올라 가는 길에 다람쥐를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https://youtu.be/YisFMV-xETo?rel=0&vq=hd1080

 

 

https://youtu.be/4JHns5n68RA?rel=0&vq=hd1080

 

 

물을 챙겨 가지 않아도 올라 가니 감로수가 있긴 했습니다.

 

 

 

 

이제 내려오면서 불국사로 갔습니다.

 

여기도 계단이 많고 경사가 있었습니다.

 

석가탑, 다보탑 등등 한참 봤네요.

 

 

 

 

저녁 식사로 먹을 교리 김밥을 구입하기 위해서 이동했습니다.

 

[음식정보] -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 교리김밥 경주교동본점

 

첫 날 일정은 끝났습니다.

 

경주 한화 리조트의 뽀아빌에 가서 오전에 물놀이 했습니다.

 

나와서 고봉민 김밥집 가서 점심 식사 했습니다.

 

 

 

 

그리고는 문무대왕릉에 갔는데 헤어 드라이어 같은 뜨거운 바람이 불다가도 아주 찬 에어컨 바람이 불기도 해서 진짜 신기했습니다.

 

얼마 전 간 주문진에서는 그런 현상이 전혀 없었거든요.

 

https://youtu.be/uARrSL5PlG8?rel=0&vq=hd1080

 

 

 

 

 

다 보고 숙소로 돌아 가는 길에 키덜트 뮤지엄으로 갔습니다.

 

[여행] - 경상북도 경주시 북군동 키덜트 뮤지엄

 

진짜 볼 것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자동차 박물관은 다음에...

 

숙소 들어 가서 물놀이 했던 것들 정리하고 잠시 쉬다가 저녁 먹으러 나왔습니다.

 

양푼이 찜갈비?

 

맵지 않게 해달라고 해서 딸도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음식정보] - 경상북도 경주시 황오동 대구갈비

 

다 먹고 안압지를 가려 했는데 주차장이 만차라서 포기하고 월정교로 이동했습니다.

 

여기는 공영 주차장이 진짜 한산했습니다.

 

그럼에도 갓길에 주차한 사람들이 많더군요.

 

 

멀리서 월정교 바라보면서

 

 

교촌을 바라보면서

 

 

LG전자 V30이 월정교의 좋은 모습을 다 담아 내지 못하는 것이 아쉽더라구요.

 

 

 

 

다 보고 숙소로 가서 둘째 날의 일정이 끝났습니다.

 

셋째 날 아침 식사는 경주 시내 고봉민 김밥집에서 했습니다.

 

 

 

집으로 오기 전에 강핏자에 나왔던 장소가 카페로 개업했다고 해서 가 보았습니다.

 

[음식정보]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강핏자

 

정말 딸을 위해서 신경 써서 다녀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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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북군동 키덜트 뮤지엄

여행 2019. 8. 4.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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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 콜로세움

 

외형부터가 남 다르다.

 

제가 좋아서 갔는데 딸도 좋아했습니다.

 

사진에는 없는데 장난감이나 인형을 보내주면 잘 사용하겠다고 합니다.

 

이제부터 사진들 많습니다.

 

중간에 보니 대한항공 가족들 갑질에 대해서 비판하는 작품도 있네요.

 

 

 

 

 

 

 

그 옆에 자동차 박물관도 있었는데 시간이 늦어서 가지는 못했습니다.

 

 

체험할 수 있는 곳인지 몰라도 교통 공원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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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경주시 한화 리조트 담톤

여행 2019. 8. 4.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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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만에 경주 한화 리조트를 방문했습니다.

 

에톤으로 하계 휴가 신청했으나 담톤으로 배정 받았습니다.

 

예전 수영장은 스프링돔으로 불렸는데 규모가 작아서 아예 뽀로로 아쿠아 빌리지로 리모델링했네요

 

 

 

시설 안내입니다.

 

참고로 프론트는 담톤 1층에 없고 에톤 1층에 있습니다.

 

 

아침 일찍 가서 대기표 1번 받았습니다.

 

 

높은 층으로 배정 받고 짐 정리하면서 찍은 사진입니다.

 

 

같은 시간 켄싱턴 리조트 주차장은 한산한데, 한화 리조트는 복잡했습니다.

 

 

밤에 프론트 근처입니다.

 

 

담톤 1층입니다.

 

 

이런 곳 오면 알콜 섭취 해줘야죠.

 

술 해장(?) 위해 아이스 초코도 먹었습니다.

 

 

아침에 일어 나서 보문호를 바라 보았습니다.

 

 

담톤 뒷 편에 주차장이 있는 것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이번에 못 간 에톤입니다.

 

 

엘레베이터 안에 있는 안내입니다.

 

 

조식 뷔페 맛있게 먹었습니다.

 

 

 

프론트 근무자께서 회원 레포츠 카드 혜택보다 패키지가 더 저렴하다고 합니다.

 

 

시간에 맞추어 공연을 하는데, 탈 쓰신 분들 엄청 더웠겠어요.

 

 

오전에 놀았던 뽀아빌입니다.

 

 

밤에 에톤과 담톤 사이 솔내음 레스토랑 가는 길에

 

수영장을 물고기 수조로 활용하는 곳이 보이더군요.

 

 

공연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실내에서 보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2박 3일 잘 쉬다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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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문진 일출

여행 2019. 7. 14.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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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날씨가 좋았고

 

다른 하루는 날씨가 좋지 않았습니다.

 

각각 촬영해 봤습니다.

 

 

구름이 많이 끼었습니다.

 

 

육지쪽도 찍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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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공항 입국장 면세점

여행 2019. 6. 16.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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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입국장 면세점이 생겼다고 해서 구경 겸 갔습니다.

 

제 1여객 터미널의 경우 6번과 7번 수화물 찾는 곳 근처에 있습니다.

 

 

와인을 1개 구입했는데 중소기업 면세점이라 그런지 에어캡이나 박스 없이 병만 주길래 좀 당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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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키나와 나하 공항을 떠나며

여행 2019. 6. 16. 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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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진짜 일정의 마지막입니다.

 

나하 공항에서 인천 공항으로 가기 전에 찍은 사진들입니다.

 

공항 규모는 작았습니다.

 

 

안내센터가 있는데 무인인가 봅니다.

 

 

마지막까지 쇼핑을 하게 되네요.

 

 

일본 가면 많이 구입한다는 초코렛, 쫄깃 쫄깃 해요.

 

 

아래의 김치 우동이 맛있다고 해서 먹어 봤는데, 진짜 맛있더라구요.

 

며칠만에 김치를 먹으니 감동의 물결이...

 

 

자판가의 나라답게 무언가 많이 판매합니다.

 

 

창 밖으로 비행기들이 보입니다.

 

 

이제 인천으로 갈 비행기가 도착하길 기다립니다.

 

 

램프 말고 개인별 송풍구가 있어서 덥지 않게 할 수 있더군요.

 

내부와 외부의 습도 차이가 많아서 인지, 냉장고에 있는 듯한 연기쇼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인천으로 갈 때는 기내식을 신청했습니다.

 

에어서울의 경우 목적지에 따라서 기내식이 정해져 있었습니다.

 

https://flyairseoul.com/CW/ko/in-flight-special-meals.do

 

저는 건강 도시락을 선택하고, 다른 가족들은 샌드위치를 선택했습니다.

 

 

https://youtu.be/3sxNdad7Kos?rel=0&vq=hd1080

 

 

 

보안 검색을 마치고인지? 출국 확인을 마치고인지? 몰라도

 

여권에 붙은 면세점 영수증을 떼서 통로 중간에 있는 보관함에 버리라고 되어 있네요.

 

어차피 여권 번호로 구매 이력을 저장 시킨다면 굳이 종이를 부착할 필요 없고,

 

이렇게 버릴 것인데 왜 부착하라고 하는 것인지 모르겠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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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키나와 Alexander & Sun 면세점

여행 2019. 6. 1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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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을 싫어하는 분들도 계시지만,

 

외국 나왔으면 해당 지역의 무언가 의미 있는 물건이나

 

면세로 구입하면 좋을 것들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화장품, 건강 보조 식품, 장난감, 전자제품 등등 다양하나 것들이 있는 곳이었습니다.

 

 

다른 것보다 세면대가 일체형으로 되어 있는 것이 신기했습니다.

 

물 나오는 곳, 거품 비누 나오는 곳, 손 말리는 온풍 나오는 곳 3개가 있습니다.

 

 

아래들은 매장 내 사진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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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키나와 토마리 이유마치 (泊いゆまち) 수산 시장의 참치 해체쇼

여행 2019. 6. 16.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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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26kg짜리 참치 해체하는 것을 보고 시식했습니다.

 

냉동이 아니라서 그런지 먹으니 살살 녹네요.

 

 

https://youtu.be/tSIVD1HzCRI?rel=0&vq=hd10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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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키나와 메르큐어 호텔 근처

여행 2019. 6. 16. 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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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장소로 이동하기 전에 호텔 내부와 주변 사진 찍었습니다.

 

아이맥이 있었는데 사용은 안 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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